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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

에릭슨의 생애가 이론에 미친 영향

by 울디 2022. 7.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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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릭슨의 생애가 이론에 미친 영향

 에릭 에릭슨은 1902년 독일의 프랑크푸르트에서 태어나서 코펜하겐에서 성정하였다. 에릭슨의 친아버지는 데인(Dane)이라는 이름을 가진 덴마크인이며, 어머니인 아브라함슨(Karla Abrahamsen)은 유대인으로, 에릭슨의 부모는 그가 태어나기 전에 이혼을 하였다. 에릭슨이 세 살 되던 해에 그의 어머니는 유대인 소아과 의사인 홈부르거(Theodor Homburgar)와 재혼을 하였다. 그는 양부의 성을 가지고 살게 된다. 어머니가 그에게 말을 해 주지 않았기 때문에 청년이 되어서야 홈부르거가 양부임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때의 어머니의 행동을 에릭슨은 '사랑의 속임수'라고 표현하였다. 그는 성장 과정에서 부모의 이혼과 재혼으로 인한 이름의 변경과 외모 그리고 지리적인 상황 등으로 인하여 정체감의 혼란을 겪게 된다. 그가 태어나고 자랐던 지역의 지리적 ・ 역사적 상황도 그를 힘들게 하였다. 남다른 외모로 인한 갈등도 많았다. 어린 시절 유대인 사이에서 자랐지만, 큰 키와 흰 피부 그리고 금발머리에 푸른 눈의 스칸디나비안 외모 때문에 어려움을 많이 겪었다. 아버지의 혈통을 따르면 덴마크인이고, 태어난 곳은 독일이며, 양부와 모친은 유대인이었던 그의 환경을 생각해 보면, 그가 성장 과정에서 느꼈을 갈등을 충분히 짐잘해 볼 수 있다. 그는 학창 시절에 사원학교와 문법학교를 다녔는데, 사원학교의 유대인 친구들은 금발과 흰 피부의 외모 때문에 그를 이교도라며 놀렸고, 문법학교의 독일인 친구들은 그를 유대인이라며 가까이하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청년기 때에 제1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독일에 대한 애국심과 덴마크인 혈통 사이에서의 정체감에 대한 혼란과 위기를 경험하였다. 이런 성장 과정에서 겪은 혼란스럽고 애매한 상황은 자신에 대한 정체감(identity)의 혼란으로 이어졌으며, 후에 자아정체감이론이나 성격 형성에서 사회적 환경을 중시하는 이론을 주장하게 된 데 영향을 준 이유가 되었을 것이라고 여겨진다. 에릭슨이 정규교육을 받은 것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것이 다였다. 그의 학교 성적은 중간 정도였지만, 예술을 하는 어머니를 닮아서인지 역사와 미술 분야에는 재능이 있었다. 에릭슨이 고등학교를 졸업한 수 양부는 그가 의사가 되기를 원했지만, 그는 예술가가 되기 위해 예술학교에 등록했다. 그는 예술 공부를 하면서 한 학교에 오래 다니지 못하고 학교를 여러 군데 옮겨 다녔으며, 그렇게 유럽의 전 지역을 방황하게 된다. 아무런 목적 없이 일광욕을 즐기기도 하고, 미술관에 가기도 하고, 때로는 다리 밑에서 노숙 생활을 하는 등 방황하던 그 당시의 삶은 에릭슨에게 아동기와 성년기 사이의 일종의 모라토리움(moratorium, 집행유예)에 해당하는 시기였다. 청년기에 방황했던 이 기간이 에릭슨에게는 자신의 잠재력과 한계를 찾고, 정체감과 관련된 고통스러운 아동기의 잔재를 정리하고 자신의 삶의 목적을 세울 수 있는 기회를 가져다주었다. 유럽의 전 지역을 돌아다니던 중에 비엔나에 가게 되면서 에릭슨은 새로운 인생을 맞이하게 된다. 비엔나에서 에릭슨은 후에 정신분석학자가 된 동료 피터 블로스(Peter Blos)로부터 안나 프로이트(Anna Freud)의 친구인 도로시 버링엄(Dorothy Burlingham)이 운영하는 학교의 교사 제안을 받고 근무하게 된다. 이 학교는 자녀교육을 위해 설립되었기에 에릭슨은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서도 탐구를 하게 되고,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에도 매력을 느끼게 된다. 그때부터 6년 동안 안나 프로이트에게 정신분석 수련을 받았으며, 1933년 정신분석 훈련을 마친 후 그 당시 유명했던 비엔나 정신분석연구소의 회원이 되었다. 수련을 받는 동안 학교에서 무용을 가르치던 캐나다 여성인 조안(Joan)과 결혼을 하고, 두 아들을 낳았다. 그의 아내 조안은 직업 댄서이자 작가로서 에릭슨이 이론적인 틀을 구축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는 결국 양아버지가 바라던 대로 아동의 심리를 치료하는 정신의학자가 되었으며, 그가 맨 처음 집필한 논문은 ⌜홈부르거(Homburgar)⌟라는 이름으로 출판되었다. 하지만 그는 37세 되던 1939년에 미국 국적을 취득하면서 에릭슨이란 이름으로 개명을 하였다. 에릭슨이란 이름에 얽힌 여러 일화가 있지만, 에릭슨은 자신에게 생부의 이름을 지어줌으로써 스스로 정체감을 부여하고자 한 것 같다. 에릭슨에게 있어서 정체감에 대한 갈등은 그가 자신의 출생 비밀을 알고서부터 더욱 커진 것이라고 여겨진다. 그 후 에릭슨은 나치의 위협을 피해 덴마크로 잠깐 이주하였다가 미국의 하버드 의대에 자리를 잡고 아동을 대상으로 임상 활동을 하게 된다. 그 무렵에 유명한 심리학자인 헨리 머레이(Henry Murray)와 쿠르트 레빈(Kurt Lewin), 그리고 문화인류학자인 루스 베네딕트(Ruth Benedict), 마거릿 미드(Magaret Mead), 그레고리 베이트슨(Gregory Bateson) 등과 교제하며 지식을 나누게 된다. 이들과의 만남이 후에 에릭슨의 연구 활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들의 영향을 받아 그는 여러 명의 유명한 역사적 인물들을 심리역사학적으로 연구하였을 뿐만 아니라 다양한 문화에 속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연구를 하였다. 이후에 에릭슨은 미국의 예일 대학, 버클리 대학, 펜실베이니아 대학 등에서 강의를 하였고, 1950년대에 ⌜아동기와 사회(Childhood and Society)⌟라는 책을 저술하였다. 이 책에서 프로이트의 이론을 확장한 자신의 생각을 소개하였으며, 이 책을 통해 미국의 자아심리학을 대표하는 학자로서 인정을 받게 되었다. 그 이후 10년 동안 여러 곳의 기관과 병원 그리고 학교에서 강의 활동을 하였으며, 저술과 연구를 통해 심리사회이론을 정립하였다. 1960년 하버드로 다시 돌아가 삶의 주기(Life cycle)에 대하여 강의하였고 1970년에 은퇴하였다. 그가 쓴 유명한 무저항주의자 간디의 개인 역사에 대한 서적인 ⌜간디의 진리(Gandhi's Truth, 1969)⌟는 퓰리처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는 심리사회이론을 통해 기술했던 '성숙한 성인'의 모습처럼 자기 계발을 위한 노력을 삶의 후반기까지 계속하였으며, 1994년 9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에릭슨은 다른 유명한 심리학자들과 다르게 대학 졸업장도 없었지만, 하버드대 교수를 역임하였을 뿐만 아니라 20세기에 가장 저명하고 영향력이 있는 심리학자 중 한 사람으로 불리고 있다. 그가 저술한 대표 저서를 살펴보면, ⌜청년 루터, 정신분석과 역사의 연구(Young Man Luther, A Study in Psychoanalysis and History, 1958)⌟, ⌜통찰력과 책임 (Insight and Responsibility, 1964a)⌟, ⌜정체: 청년과 위기(Identity: Youth and Crisis, 1968a)⌟, ⌜청년: 변화와 도전(Youth: Change adn Challenge, 1963a)⌟ 등이 있다. 그리고 ⌜장난감과 이성(Toys and Reasons, 1977)⌟, ⌜성인기(Adulthood, 1978)⌟ 등은 에릭슨이 연로하였을 때 나온 저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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