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슬로의 생애가 이론에 미친 영향
매슬로는 1908년 미국 뉴욕 시의 브룩클린 근교에서 일곱 명의 남매 중 첫째로 태어 났다. 그의 부모는 러시아에서 이민을 온 유대인으로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였다. 이와 같은 이유로 그의 부모는 그가 학문적으로 성공하기를 간절하게 바랐던 것 같다. 이민을 온 대부분의 유대인이 열심히 살았던 것처럼, 그의 부모도 열심히 일을 하여 중류 층으로 살아갈 수 있었다. 매슬로는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나는 어린 시절에 정신이 돌지 않은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나는 이웃에 유대인이 라고는 전혀 없는 곳에서 산 어린 유태계 소년이었다. 그것은 모두가 백인인 학교에 혼자 흑인인 처지와 비슷하였다. 나는 외로웠고 불행했다. 나는 친구도 없이 도서관 의 책 속에 파묻혀 자랐다.
그는 친구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부모와도 그리 친밀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그의 외모에 대하여 조롱하였고, 이로 인해 그는 지하철을 탈 때 다른 사람의 눈에 띄지 않는 빈칸을 찾는 버릇이 생겼다. 더욱이 그의 어머니는 아이들이 냉장고에 있는 음식을 마음대로 먹지 못하게 냉장고를 자물쇠로 잠그기까지 하였다. 매슬로는 자신의 어머니를 '잔인하고 무식하며 적대감으로 가득 찬 인물이고, 너무 미워 미칠 정도' 라고 묘사하 였다. 이렇게 불우한 어린 시절의 경험은 매슬로에게 어떻게 하면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하도록 만들었으리라 짐작된다. 이 시기는 그가 주장한 자아실현이론의 가장 하위 단계인 생리적 욕구의 충족과 가장 관련이 있는 시기로 볼 수 있다. 또한 인간이 가지고 있는 긍정적인 측면에 관심을 둔 매슬로의 인본주의적 견해는 부모와의 이런 부정적인 경험에 대한 반작용으로 출현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매슬로는 아버지의 권유로 뉴욕시립대학교의 법과대학에 진학했으나 곧 적성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학교를 그만 둔다. 그 후에 코넬 대학교를 거쳐 위스콘신대학 교에서 심리학을 전공하였다. 위스콘신 대학교에서 아내 베르타(Bertha)와 결혼했을 때의 매슬로의 나이는 20세였다. 그는 후에 "결혼하기 전까지 내 삶은 의미가 거의 없었다."라고 말하였다. 결혼을 통하여 안정을 찾은 이 시기는 그의 자아실현이론에서 안전의 욕구와 소속감과 애정의 욕구를 충족하는 단계로 설명할 수 있다. 매슬로가 심리학에 매력을 느끼게 된 것은 1930년대에 많은 사람의 관심을 받았던 왓슨(John B. Watson)의 행동주의 심리학 때문이었다. 그는 1934년에 위스콘신대학교 에서 그 당시 유명한 원숭이의 애착 실험 연구자였던 할로우(Harry Harlow)의 지도 아래 원숭이의 지배성에 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그는 동성애에 대한 연구가 인간성을 깊이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라고 보았으며, 학습이론가로 유명한 손다이크(Thorndike)의 연구조교로 일을 한 적도 있다. 훗날 심리학의 제3세력이라고 일컫는 인본주의 심리학을 주도한 매슬로가 처음 관심을 가졌던 분야가 행동주의라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다.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30년대와 1940년대는 나치의 위협을 피해 유럽의 지식인들 이 뉴욕으로 모여드는 시기였다. 이 시기에 매슬로는 호나이(Karen Horney), 프롬(Erich Fromm), 아들러(Alfred Adler) 등을 만났으며, 게슈탈트 심리학자인 베르트하이머(Max Wertheimer)와 인류학자인 베네딕트(Ruth Benedict)와도 교류하였다. 이러한 지식인들 과의 만남이 후에 인본주의 심리학의 토대를 형성하는 기반이 되었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의 경험 또한 매슬로 자신의 인생의 방향을 바꾼 경험이 되었다. 그가 33세였던 1941년 12월 7일은 일생에 가장 감명 깊은 체험을 했던 날로서 바로 그날의 체험은 그 의 남은 인생을 완전히 뒤바꿔 놓은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는 전쟁이 최고조에 달한 진주만 사건 직후의 경험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세계 정세는 혼란과 공포로 치달았고 일본의 진주만 공격은 제2차 세계대전의 발 발을 예고하였다. 매슬로는 당시 브룩클린 대학 교수로 재임하면서 전형적으로 홀 륭한 인간성을 갖춘 두 사람에 대한 연구에 몰두하고 있던 중이었고, 그날은 일본의 진주만 습격이 있은 후 며칠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그가 차를 운전해서 집으로 향 하고 있었는데, 마침 한 무리의 무질서한 행진 행렬이 그의 곁을 지나고 있었다. 그 행진 행렬에서 자아내는 소리란 플루트의 요란한 불협화음이 전부였고, 구성원들도 몇 명의 소년단과 촌스러운 제복을 입은 노인들이 전부였다. 그러나 그들은 몸이 흠 뻑 젖을 정도로 열심을 다해 연주를 했으며, 경건하고 숙연한 모습으로 미국 국기를 들고 있었다. 그런 형편없는 모습을 하고도 숭고한 애국심을 유발시킬 수 있는 인간 의 무한한 잠재력과 순결하고 고결한 인간의 본성에 감동하여 그의 눈에서는 눈물 이 흐르기 시작했다. 히틀러, 독일인, 스탈린, 공산주의자들은 모두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 같았다. 우리는 그들 중의 아무도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사람들이 테이블 주위에 둘러 앉아 인간의 본성과 미움, 전쟁과 평화, 형제애 등에 관해 이야 기를 나누는 평화스러운 모습을 그려보았다. 그 순간 나의 전 생애는 변했고, 그 이 후로 나의 할 일이 결정되었다. 1941년 그때 이후로 나는 실험과 조사 연구를 통해 검증할 수 있는 인간 본성에 대한 이론의 발전에 전념하게 되었다.
매슬로가 자신의 관점을 행동주의적 관점에서 인본주의적 관점으로 바꾼 또 하나의 동기는 첫째 아이의 출생과 관련이 있다. 그는 첫 아이의 출생을 '청천벽력'이라고 표현하면서 "나는 신비감과 통제할 수 없는 기분에 휩싸였다. 이러한 경험을 하기 이전에는, 나는 별 볼일 없고 정신적이나 신체적으로 약하다고 느꼈다. 나는 아이를 가져 본 사람은 누구라도 행동주의자가 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이렇듯 첫 아이의 출생과 인본주의적 관점을 가지고 있던 여러 심리학자들과의 만남은 그가 행동주의적 관점에서 인본주의적 관점으로 전환하게 한 계기로 작용했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의 인간성 상실에 대한 회의는 매슬로에게 인간의 본성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인간의 부정적인 면보다 무한한 잠재력을 가진 긍정적인 측면에 주목하게 만들었다. 그가 자신의 이론에서 스스로의 잠재력을 발휘하는 자기실현 욕구 단계를 주장한 데서 이런 점을 볼 수 있다. 매슬로는 43세 되던 1951년에 브랜다이즈 대학교의 심리학과 과장으로 임명되어 1969년도까지 거의 20년 동안을 심리학 교수로 재직하였다. 그 기간에 미국심리학회 회장으로 선출되기도 하였고, 여러 사회 문제와 관련된 활동을 하면서 그는 미국 심리 학계의 인본주의 운동의 핵심 인물이 되었다. 1969년에 학교를 떠나 캘리포니아의 비 학술단체인 라훌린(Laughlin) 자선단체의 특별회원으로 자유롭게 활동하였다. 그리고 1년 후 1970년에 오래 앓고 있던 심장질환으로 사망하였다. 인생의 후반에 그는 심리학 영역뿐만 아니라 정치학, 윤리학 등에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대중에게도 영향력을 끼쳤다. 그의 주요 저서들을 살펴보면, 존재의 심리학으로(Toward a Psychology of Being, 1962)』, 『종교, 가치관 그리고 절정경험(Religions, Values, and Peak of Experiences, 1964)』, 『동기와 성격(Motivation and Personality, 1970)』 등이 있으며, 매슬로가 사망하고 2년 뒤에 그의 아내의 도움으로 아브라함: 회고집(A Memorial Volume)』 이 출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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