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러의 생애
아들러는 1870년 오스트리아의 비엔나 근교에 있는 펜지히에서 태어났다. 유대인인 그의 아버지가 중개업 ・ 도매업에 종사하였기 때문에 경제적으로는 비교적 넉넉한 편이었다. 6형제 중 둘째로 태어난 그는 재주가 많은 형으로 인하여 많은 열등감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두 살 정도까지는 엄마의 따뜻한 사랑을 받았으나, 동생이 태어난 후로는 사랑마저 뺏기게 된다. 형제간의 출생순위와 관련된 이러한 경험은 후에 그의 이론에서 성격 형성에 영향을 미치는 출생순위에 대한 개념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아들러는 죽음과 질병의 공포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가 세 살 때 어린 동생이 바로 옆 침대에서 죽어가는 모습을 목격했고, 그 자신도 길거리에서 손수레에 치여 두 번이나 죽을 뻔 하였다. 다섯 살 때는 폐렴에 걸려 등에 부목을 대고 붕대로 감고 다녔다. 구루병으로 등이 굽은 그는 제대로 뛰어다니지도 못했으며, 구석에 앉아서 친구들이 노는 모습을 바라보아야만 했다. 그는 전공을 몇 번이나 바꾸었다. 안과의사로, 그리고 일반의로, 마지막은 정신과 의사를 택하게 된다. 특히 그는 아동에 대한 심리치료, 학교, 가족상담 등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고, 이 분야에 지대한 업적을 남겼다. 이는 유난히 병약한 아동기를 보냈던 자신의 경험과 무관하지 않으리라고 본다. 그는 중학교 때 반에서 늘 꼴찌를 하였다. 특히 수학 과목을 못해서 여러 번 낙제를 하였으며, 담임선생님이 그의 아버지와 면담 중 아들러는 제화공(shoemaker)을 시키는 편이 낫겠다는 말을 할 정도로 공부에 재능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의 끊임없는 격려와 지지로 공부를 열심히 하여 학업에 대한 열등감을 극복하고 고등학교를 성적 우수생으로 졸업을 할 수 있었다. 이처럼 아들러는 어린 시절의 신체적인 열등감과 지적 열등감에 대한 보상으로 의사이자 심리학자가 된 것으로 여겨진다. 개인심리이론에서 인간이 열등감을 보상하기 위하여 우월성을 추구한다는 아들러의 주장은 스스로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하여 노력했던 그의 성장 과정에서 찾을 수 있다. 아들러는 1987년 러시아 사람인 라이샤 엡스타인과 결혼하여, 세 명의 딸과 한 명의 아들을 낳았다. 아들러는 대학 시절 사회주의에 많은 흥미를 가졌으며, 정치적인 모임에도 즐겨 참여하였다. 아들러의 사회주의 사상에 대한 관심과 급진주의자였던 아내와의 만남, 그리고 볼셰비키 혁명을 주도한 트로츠키와의 우정 등은 후에 그의 이론 중 '사회적 관심'이라는 핵심 개념에 영향을 주었다. 1902년 프로이트의 꿈 분석을 공격한 내용이 지역신문에 게재되자 아들러가 이를 비판했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프로이트가 아들러를 초청, 두 사람의 관계가 시작되었다. 아들러가 1907년에 발표한 논문인 ⌜신체 기관의 열등에 관한 연구(A study of organ inferiority and its psychical compeniation: A contribution to clinical medicine)⌟는 프로이트의 절대적 지지를 받았으며, 이어서 그는 비엔나 정신분석학회 회장이 되었다. 1908년 아들러는 ⌜공격성 본능 개관(Introduction to Aggression⌟에서 성 본능 대신 공격성을 행동의 원천으로 주장하여 프로이트와 관계가 악화되었다. 이 일로 인해 두 사람은 결별하게 되었다. 당시 프로이트와 아들러가 겪은 불화와 갈등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는 일화가 있다.
아들러가 사망하였다는 소식을 전하는 친구의 말을 들은 프로이트는 "나는 왜 당신이 아들러를 동정하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비엔나 촌에서 태어난 한 유태계 소년이 대도시 애버딘에서 죽은 것은 그 자체가 전례 없는 출세이며, 그가 큰 성공을 했다는 증거입니다. 그가 정신분석학을 반대한 것에 대하여 세계는 너무나 과분한 보답을 하였습니다."라고 말했다.
프로이트와의 대립으로 아들러는 1911년 정신분석학회를 탈퇴하고, '자유정신분석학회'를 결성하였으며, 1912년에는 개인심리학회로 명칭을 바꿨다. 1912년 아들러는 ⌜신경증 체제⌟란 책에서 열등감과 우월성 추구라는 개념을 주장하였으며, 그 후 신경증에 대한 사회적 관점을 발전시켰다. 제1차 세계대전중에 그는 오스트리아의 군의관으로 종군하였으며, 전쟁 후에는 지역사회의 정신건강을 증진시키기 위한 아동상담소를 개설하였다. 1922년에는 아동생활지도 클리닉을 신설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오스트리아 공립학교에 아동생활지도센터가 설립되었다. 1926년 이후에는 미국의 유수 대학에서 순회강연을 하였으며, 1932년 뉴욕의 롱아일랜드 의과대학 교수로 초빙되었다. 1934년 나치의 유대인 추방정책으로 그는 뉴욕에 정착하였다. 아들러는 지칠 줄 모르는 강연가라고 불릴 만큼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강연을 하였다. 그러던 그는 1937년 순회강연 중 스코틀랜드의 에버딘에서 67세의 나이에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그는 300여 권의 많은 책과 논문집을 남겼는데, ⌜개인심리학의 이론과 실제(The Practice & Theory of Individual Psychology, 1927a, 1927b⌟는 아들러의 성격이론을 가장 잘 나타내는 개론서다. 그 외에도 ⌜기관 열등감과 심리적 보상의 한 연구(A Study of Organ Inferiority and Its Psychical Compensation, 1917b )⌟, ⌜생활양식(The Pattern of Life, 1930a)⌟, ⌜사회적관심: 인류에의 도전(Social Interest: A Challenge to Mankind, 1939⌟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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